5·18은 어떻게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기억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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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어떻게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기억이 되었나
국립5.18민주묘지의 태극기. Image: Salamander724, Wikimedia Commons

광주에서 서울로, 그리고 홍콩의 거리로 이어진 시민의 시간

🇬🇧 🇯🇵

5월 18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날짜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비극의 날짜만은 아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군부 폭력의 참혹함을 보여준 도시였고, 동시에 시민이 스스로 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도시였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단지 정권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폭력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시민의 자격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벌어진 군사정권에 맞선 시민들의 민주항쟁이었다. 유네스코는 5·18 관련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며, 이 기록들이 시민들의 저항, 진압, 그리고 이후 진상 규명과 보상 요구의 과정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유네스코는 5·18이 한국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1

광주는 오랫동안 고립된 도시였다. 당시 국가권력은 광주를 폭도와 혼란의 도시로 만들려 했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시민들의 목소리는 왜곡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억 중 하나가 되었다. 한때 은폐되고 왜곡되었던 사건은 이후 한국 사회가 권력, 폭력, 시민, 국가, 민주주의를 다시 묻는 출발점이 되었다.

5·18의 의미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광주는 패배한 항쟁처럼 보였다. 군부는 도시를 진압했고,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늘 그 순간의 승패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광주는 진압되었지만, 기억은 진압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 가족들의 애도, 학생운동과 시민사회의 기록, 노래와 문학, 사진과 재판, 그리고 매년 반복되는 추모는 광주를 한국 민주주의의 도덕적 기준으로 만들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그 기억 위에서 가능했다.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5·18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광주는 1987년의 거리에서 다시 살아났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다시 드러냈고, 시민들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1987년 6월의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의 문을 열었다. 광주에서 억눌렸던 질문—국가는 시민에게 총을 겨눌 수 있는가, 권력은 진실을 은폐할 수 있는가, 시민은 두려움 앞에서 침묵해야 하는가—는 7년 뒤 서울과 전국의 거리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1987년 이한열 열사 추모 군중. 6월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문을 열었다. Image: 서울역사박물관, Korea Open Government License Type 1.

그런 의미에서 5·18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기억 체계가 되었다.

이 기억은 2024년 12월 3일 밤에도 되살아났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한국 사회에 1980년의 기억을 즉각 불러냈다. 로이터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가 1980년 이후 한국에서 처음 선포된 계엄이었다고 보도했다.2 계엄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국인들에게 광주와 군사독재의 기억을 환기한 것이다.

12·3 비상계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국회와 시민사회, 언론,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한국 민주주의가 단순한 제도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 위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80년 광주의 기억은 “계엄”이라는 단어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한국 사회가 너무 잘 알고 있음을 의미했다. 외신들도 12·3 계엄이 1980년 광주의 기억을 다시 불러냈다고 분석했다.3

민주주의는 법 조항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민이 어떤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가에 의해 지켜진다. 광주의 기억은 한국 사회에 하나의 경고 장치처럼 남아 있었다.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사람들은 단순히 정치 뉴스를 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위험 신호를 보았다. 5·18은 그렇게 과거의 사건을 넘어 현재의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기억이 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의미는 한국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현대사는 민주화의 역사이자, 동시에 국가폭력과 기억투쟁의 역사다. 한국의 5·18, 대만의 계엄과 민주화, 필리핀의 피플 파워, 중국의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 홍콩의 2019년 민주화운동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벌어졌지만, 모두 국가권력과 시민의 존엄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물론 이 사건들을 하나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광주와 톈안먼, 홍콩은 각기 다른 정치체제, 국제환경, 시민사회 조건 속에서 일어났다. 특히 5·18이 1989년 중국 민주화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민주화운동을 함께 놓고 보면, 비슷한 질문이 반복된다.

국가는 시민의 요구를 어떻게 대하는가.
시민은 폭력 앞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지키는가.
진압된 항쟁은 어떻게 기억으로 살아남는가.
그리고 기억은 다음 세대의 저항에 어떤 언어를 제공하는가.

5·18이 동아시아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광주는 진압되었지만,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언어가 되었다. 이 점은 중국의 톈안먼과 중요한 대비를 이룬다. 한국에서 광주는 공적 기억으로 자리 잡았고,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으며, 국가기념일과 추모 의례 속에서 계속 호명된다. 유네스코는 5·18 기록물이 시민 저항과 진압, 이후의 진상 규명과 보상 요구 과정을 담고 있으며 한국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중국에서 1989년 톈안먼은 여전히 엄격히 통제되고 억압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같은 국가폭력의 기억이라도, 어떤 사회에서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고, 어떤 사회에서는 침묵의 대상이 된다. 이 차이는 민주주의가 단지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을 어떻게 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홍콩의 경우, 광주와의 연결은 더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다.

2019년 홍콩 민주화운동은 송환법 반대에서 시작되었다. 홍콩 정부가 범죄인 인도를 중국 본토까지 가능하게 하는 법안을 추진하자, 시민들은 이것이 홍콩의 법치와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국제앰네스티는 2019년 홍콩 시위가 이 송환법 추진에서 촉발되었고, 이후 경찰 폭력과 정치적 자유의 문제로 확대되었다고 설명한다.4

홍콩의 거리는 곧 거대한 정치적 무대가 되었다. 검은 옷을 입은 시민들, 우산과 헬멧, 레이저 포인터, 텔레그램 채널, 인간 사슬, 공항 점거, “Be Water”라는 유동적 전술. 홍콩의 민주화운동은 21세기 도시형 시민저항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도부가 뚜렷하지 않은 분산형 운동,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빠른 동원, 국제 여론을 의식한 이미지와 언어의 생산은 과거 민주화운동과 다른 풍경을 만들었다.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광주와 홍콩은 서로 다른 역사 속에서 시민의 존엄이라는 질문을 공유했다. Image: Studio Incendo,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2.0 Generic.

하지만 동시에 홍콩의 운동은 놀랄 만큼 오래된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국가는 시민을 어떻게 대하는가.
시민은 압도적인 권력 앞에서 어떻게 서로를 보호하는가.
폭력과 체포, 침묵의 위협 속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노래할 것인가.

여기서 광주의 기억은 홍콩으로 건너갔다.

2019년 홍콩 시위 현장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렸다. 동아일보는 홍콩의 한 시위 현장에서 한 여성이 기타를 들고 이 노래를 한국어와 광둥어로 불렀으며, 이 노래가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곡으로 소개되었다고 보도했다.5 와이어드 역시 이 노래가 광주의 기억에서 출발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의 비공식 찬가가 되었고, 이후 홍콩 시위에서도 불렸다고 설명했다.6 

이 연결은 중요하다. 광주와 홍콩은 같은 사건이 아니다. 광주는 군사정권 아래 계엄군에 의해 고립되고 진압된 도시였고, 홍콩은 중국 주권 아래 고도의 자치와 자유를 지키려 한 국제도시였다. 역사적 조건도, 정치체제도, 결과도 다르다. 그러나 두 도시 모두 “국가권력 앞에서 시민은 어떻게 자신의 존엄을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을 공유했다.

광주에서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에서 공동체를 만들었다. 홍콩에서 시민들은 거리, 지하철역, 공항, 대학 캠퍼스, 온라인 채널을 오가며 느슨하지만 끈질긴 공동체를 만들었다. 광주의 시민들은 헌혈하고 주먹밥을 나누고 자치 질서를 만들었다. 홍콩의 시민들은 응급처치팀을 만들고, 물자를 나르고, 체포 위험을 공유하고, 시위 정보를 디지털 네트워크로 퍼뜨렸다. 방식은 달랐지만, 두 운동 모두 폭력과 공포 속에서 시민들이 서로를 보호하려 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또 하나의 연결은 노래와 기억이다.

광주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었다. 홍콩에는 〈Glory to Hong Kong〉이 있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희생자를 기리는 노래에서 출발해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Glory to Hong Kong〉은 2019년 홍콩 시위 속에서 만들어져 시민들의 비공식 찬가가 되었다. 프랑스 매체 르몽드는 〈Glory to Hong Kong〉이 2019년 반정부 시위의 한가운데서 만들어진 노래라고 설명했고, 이후 중국 당국이 이 노래를 금지했다고 보도했다.7

민주화운동에서 노래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다. 노래는 흩어진 시민을 하나의 감정 공동체로 묶는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 두려움과 희망을 함께 부를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든다. 광주에서 시작된 노래가 서울의 거리로, 다시 홍콩의 거리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기억이 국경을 넘는 방식이 때로는 선언문보다 노래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콩의 2019년은 광주의 1980년과 다른 결말을 맞았다. 한국에서 광주는 결국 1987년 민주화의 중요한 기억이 되었고, 국가적 추모와 기록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홍콩에서는 2020년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정치적 공간이 급격히 좁아졌고, 시위의 상징과 노래, 언어는 강하게 통제되었다. 이 차이는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불균등한 지도를 보여준다.

어떤 도시는 진압 이후에도 기억을 공적으로 회복한다.
어떤 도시는 기억이 금지되고, 노래가 금지되고, 이름이 지워진다.

이 차이 때문에 광주와 홍콩을 함께 읽는 일은 더 중요해진다. 광주는 민주주의가 패배 이후에도 기억을 통해 되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홍콩은 민주주의의 기억이 아직도 억압될 수 있으며, 자유의 언어가 얼마나 쉽게 범죄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기억의 회복을, 다른 하나는 기억의 현재적 위기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홍콩을 실패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2019년의 홍콩은 이미 세계 시민사회에 깊은 이미지를 남겼다. 우산, 검은 옷, “Be Water”, 인간 사슬, 공항의 노래, 지하철역의 벽보, 그리고 〈Glory to Hong Kong〉. 이 상징들은 홍콩 내부에서 억압되더라도, 홍콩 바깥의 기억 속에 계속 남는다. 광주 역시 처음에는 고립되고 왜곡되었지만, 결국 살아남은 증언과 기록, 노래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중심 기억이 되었다.

기억은 때로 아주 느리게 이동한다.
하지만 한 번 이동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5·18은 한국 현대사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동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하는 창이다. 한국은 광주를 기억함으로써 1987년의 민주화를 만들었고, 2024년의 계엄 시도를 빠르게 민주적 절차 안에서 제어할 수 있었다. 홍콩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노래와 상징을 빌려 자신의 거리에서 자유와 권리를 외쳤다. 중국의 톈안먼은 광주와 다른 결말을 맞았지만,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우리는 기억의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광주는 묻는다.

국가폭력 이후 한 사회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희생자의 이름은 어디에 남을 것인가.
진압된 항쟁은 패배로 끝나는가, 아니면 다음 민주주의의 언어가 되는가.

홍콩도 묻는다.

자유의 공간이 좁아질 때, 시민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기억할 것인가.
거리에서 사라진 노래는 어디에 남을 것인가.
말할 수 없는 시대에 기억은 어떤 형태로 살아남을 것인가.

1980년 5월의 광주는 군사적으로 패배했다. 그러나 기억의 차원에서 광주는 패배하지 않았다. 오히려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설명할 때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독재와 폭력, 계엄과 군부의 언어를 다시 마주할 때마다 꺼내 드는 가장 깊은 기억 중 하나다.

2019년의 홍콩 역시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거리의 시위는 진압되고, 노래는 금지되고, 많은 활동가들은 침묵하거나 떠나야 했다. 그러나 홍콩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집회, 해외 언론의 기록, 온라인 아카이브, 사진과 노래, 그리고 다른 도시의 민주주의 운동 속에서 계속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계속 흔들리고, 후퇴하고, 다시 요구되는 과정이다. 한국의 5·18, 1987년 6월 항쟁, 홍콩의 거리, 중국의 침묵된 기억, 그리고 2024년 한국의 계엄 저지 경험은 모두 민주주의가 단순히 선거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기억, 애도, 기록, 노래, 거리, 그리고 시민의 반복된 결단 속에서 유지된다.

국회에서 충돌한 12.3 계엄군과 시민들(2024). Image: 서울의 소리,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Unported.

5월 18일은 그래서 과거의 날짜가 아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피를 흘리고, 어떻게 기억되고, 어떻게 다시 거리로 돌아오는지를 보여주는 날짜다. 광주는 하나의 도시였지만, 그 기억은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홍콩은 그 기억이 여전히 이동하고 번역되고 다시 불릴 수 있음을 보여준 또 다른 도시였다.

5·18은 우리에게 말한다.

민주주의는 한 번 얻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기억하지 않는 사회는 같은 폭력 앞에서 다시 무력해질 수 있다고.
그리고 어떤 패배는, 오래 기억될 때 결국 다음 세대의 힘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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